17세기, 청나라 연경을 찾은 조선 사신들은 호기심에 천주당을 방문했습니다. 신기하게 생긴 건물 내부와 거대한 오르간, 처음 보는 예수와 마리아의 그림....
이들은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쓴 '천주실의'를 들여왔습니다. 당시 '서학(西學)'으로 소개된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알려진 계기였습니다. 주로 남인(南人) 계열이었던 실학자들은 함께 모여 책을 읽고, 격렬한 토론도 벌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 선교사 없이 조선 사람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천주교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교회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천주교 세력을 좌시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엄격한 성리학적 유교 질서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왕조였습니다. 제사도 거부하고, 조상의 신주도 모시지 않는 천주교는 외세의 위협으로 비춰졌습니다.
크게 네 차례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그리고 최소 8천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추산돼 가장 혹독했다는 1866년의 병인박해. 정부는 신자들을
처형하기 직전까지도 이들을 회유했습니다.
“배교(背敎)해서 잘못을 뉘우친다면 죽이지 않고 풀어주겠다” “프랑스인 사제들은 원한다면 처벌 없이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습니다. 프랑스인 사제들도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순교를 선택했습니다.그 결과
당시 프랑스 선교회가 조선을 가리켜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혹독한 박해 속에 크게 기세가 위축된 천주교였지만,
신자들은 다시 모였습니다.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꿋꿋한 모습은 세계
천주교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한국은 죽음의 땅이 아니다, 축복의 땅이다'
시간이 흘러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교황은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순교자 103명을 성인(聖人)으로 시성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등 한국인 93명과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 10명,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입니다.
1984년 시성식 당시 동영상
이제 다시 30년이 지난 올해 8월 16일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순교자 124명을 복자(福者)로 시복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 이에게 복자(福者, Blessed) 칭호를
허가하는 교황의 공식 선언입니다. 복자는 공 경의 대상으로 선포한
사람을 뜻하며,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聖人)으로 올라갑니다.
가톨릭 신앙의 훌륭한 본보기로서 심사를 마친 복자를 성인(聖人, Saint)의
명부에 올리고, 온 교회가 공경하도록 선포하는 교황의 최종적 공식
선언입니다. 성인의 이름을 따서 신자들의 세례명을 지을 수도 있게 됩니다.
나이와 성별, 직업과 신분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천국을 기다립니다. 그림 가운데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서 있습니다. 긴 고문 끝에 참수당한 39살의 궁녀 박희순 루치아, 옥졸들에게 목 졸려 죽은 13살 소년 유대철 베드로, 서양인으로 최초로 조선에 들어와 고문 끝에 숨진 35살 모방 베드로 신부...
처형 당시의 끔찍한 고통은 다 잊었다는 듯, 모두 신념과 기쁨에 가득 찬 표정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환하게 웃음 짓게 만들었을까? 그림 속 배경에는 도봉산 산자락이 우뚝 솟아있고, 하늘에는 선녀와 같은 차림의 천사들이 이들을 축복합니다.
한국적 정서로 가득한 이 그림은 1977년 문학진 서울대 미대 교수가 그렸습니다. 제작 당시의 이름은 <한국순교복자화>였지만, 103위 복자들이 1984년 성인품에 오르면서 <103위 한국순교성인화>가 되었습니다.
1984년의 교황 방한 때 103명이 가톨릭 성인이 되었지만, 박해로 목숨을 잃은 신자들은 1만 명을 훨씬 넘어섭니다. 이 때문에 1791년 신해박해 때 참수된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해 1791년부터 1888년까지의 순교자 124명을 복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지난 2009년 6월 한국 천주교회 대표단이 교황청에 청원서를 출했고, 5년이 채 못 된 올해 2월 7일에 124위 시복이 결정됐습니다.
8월 16일,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124위 순교자 시복식(링크 - 교황 방한 일정)에 참석합니다. 시복식 당일엔 124위 전체 초상이 담긴 대형 걸개그림도 공개될 예정입니다.
먼저 124위 순교자 중 대표적인 인물 8명의 초상과 일대기를 소개합니다.
보통 복자나 성인으로 추대되려면 교황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매우 까다로운 심사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103명이 한꺼번에 시성된 것은 단체로 시복·시성된 숫자로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입니다. 또 로마 교황청이 아닌 곳에서 시성이 이뤄진 것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위상과 자부심을 크게 높여준 계기였습니다.
한국 103위 순교복자에 대한 시성에는 몇 차례 특별한 우대가 있었습니다. 보통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2차례의 기적 보고가 필요합니다. 복자가 되기 위해 한 번, 성인에 추대되기 위해 또 한 번입니다. 다만 순교는 기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순교자는 1건의 기적 사례만 있어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주교단이 제출한 기적 심사 면제 청원을 받아들이면서, 외적으로 한국 103위 순교복자들은 기적 사례가 1건도 없어도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또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을 기리는 뜻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 10명들보다 한국인들의 이름이 앞에 오도록 해달라는 한국 주교회의의 청원을 받아들여 명칭도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로 결정됐습니다. 가장 큰 특혜는 시성식 장소였습니다.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주재하기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아비뇽 유수’ 기간을 제외하면 이 원칙을 깬 거의 유일한 예외가 바로 한국 103위 순교복자 시성이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방문 때 시성식을 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 향후에도 시성식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려야 한다는 원칙을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예외적으로 결정된 례였습니다.103위 한국순교성인화에서도 한국 가톨릭의 주체성이 강조된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림 제작 초기에는 앵베르 주교가 가운데에 서 있었지만, 이후 김대건 신부와 서로 자리를 바꿨기 때문입니다. 124위 순교자 시복도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호의적 시각이 크게 반영되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266대 교황으로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자 예수회 출신 교황입니다. 또 1282년만의 비유럽권 국가 출신 교황입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교황으로서도 처음인데, 청빈한 수도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검소한 생활과 겸손한 언행으로 유명하며, 소박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영어와 스페인어 등 8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폐렴 합병증으로 한쪽 폐를 절제해 50년 넘게 한쪽 폐로 살고 있습니다.
교황에 선출되고 나서 소감을 묻는 질문에 겸손하고 유머가 넘치는 답변을 내놨습니다.